관심사

여중3학년의글

사라봉 2011. 5. 25. 19:23

80년대 영락중학교 3학년이 쓴 글입니다.
참고로 종로구 효자동에 살던 이 여학생은 은평구 응암동의 영락중학교를 매일 버스로 통학하였습니다.




버려도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낡고 찌그러진 아빠의 신발을 볼 때마다,나는 견딜 수
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. 내가 이런 비참한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실직한 이후 부터였습니다.

아빠의 실직 이유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,아빠는 그 일로 몹시 괴로워하셨습니다. 가끔
주무시다가도 몸을 부르르 떠시던 모습은,마치 활동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.

실직하신 지 3개월 되었을 때,아빠는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새로 입사하셨습니다.그러나 예전
회사와는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였는지라,아빠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나 봅니다.

입사하신 지 1개월이 조금지나, 아빠는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출장 근무를 자원하셨고,회사의
허락을 받은 아버지는 그 이후 늘 출장만 다니게 되었습니다.처음에는 삼사 일이었던 출장이

조금지나서는 일이 주로 늘어났고,요즘에 와서는 한 달에 한 번씩만 겨우 집에 들어오십니다.
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의 구두는 검정색인지 황토색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.

아빠는 알 수 없으나,거의 매일 걸어다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.그나마 그 구두도 그리 오래가지는
못했습니다.원래 낡았던 구두가 어느 샌가 다 닳고,앞은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.

아빠는 그 낡은 구두를 몇 번이나 수선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수선마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,가장
값싼 운동화를 사 신으셨습니다. 우리 남매를 키우느라 구두를 살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.

그 운동화 역시 한 번 출장을 다녀오시자 금방 낡은 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. 아빠의 그 신발을
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.그래서 다가오는 아빠의 생신 때에는 반드시

구두를 선물해 드리리라 다짐을 했습니다.용돈을 따로 받아 모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,학교
오갈 때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다니기 시작 했습니다. 몇 주 지나지 않아 금세 2,000원이 모였습니다.

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.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.
소복이 쌓인 은행잎들을 밟으며 중앙청 앞길을 걸어 집으로 향해 가던중,저 앞에 웬 키 작은

남학생 한 명이 낙엽을 터벅터벅 밟으며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.바로 중학교 1학년인
남동생이었습니다. 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습니다.

"너 왜 자꾸 누나 말 안 듣니? 넌 아직 어려서 걸어다니면 피곤해져 성적 떨어지니까 버스 타고
다니라고 했잖아!" 동생은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. "그럼 난 아빠 구두 값을 어떻게 모으란 말이야?"

나는 동생에게 애원하듯 말했습니다."누나가 다 모을 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랬잖아."
갑자기 동생이 표정을 바꾸면서 물었습니다."누나,누나는 얼마나 모았어?"

7,500원이란 대답을 들은 동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. "그럼 내가 모은 것과 합하면 웬만한
구두는 살 수 있겠다! 누나, 나 그동안 2,500원 모았어! 나 잘했지?" 나는 동생이 너무나 대견스러워

하마터면 대로변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 했습니다. 일주일 지난 그 다음 토요일, 동생과 나는
남대문 시장에서 만 원짜리 구두를 샀습니다.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다음,며칠 남지 않은 아빠의 생신을

기다렸습니다. 아빠가 그날만큼은 꼭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. 마침내 아빠의
생신이 되었습니다. 학교에서 돌아오니 먼저 동생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. "너 왜 그래? 어디 아파?"

"아빠가 오늘 못오신대.그러니까 구두를 드릴 수가 없잖아."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로고 있었습니다.
다 낡아 빠진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지금도 어느 길 위엔가를 걷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자,어느새

내 눈에도 뜨거운 이슬이 한 방울씩 맺히고 있었습니다. 그러나 그것은 아쉬움의 눈물이었을 뿐
더 이상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. 우리에게는 아빠에게 드릴 새 구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.








우리가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결심을 합니다.

그러나 그 결심의 토대가 감정으로 한 것이면 감정이 식어지면 결심은 사그라 듭니다.

이 남매가 먹고싶었던게 없었을 까요? 갖고 싶었던게 없었을 까요? 몸이 지쳐 다리가 천근 같이

느껴질 때 왜 버스를 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?

그런데도 무엇이 이 아이들로 하여금 효자동에서 응암동까지 몇 달 동안이나 걸어다니게 했겠습니까?

두 말 할 것도 없이 그들의 이성이었습니다. 그 남매는 아버지를 사랑하되 감정적으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

온 이성을 동원하여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.



[비전의 사람] 중에서, 이재철

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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